私には忘れそうになれば連絡して質問を吐き出したり進路の悩みを話す後輩がいる。 正確には部下だった友人なのでそれほど近い後輩ではないが、進路の悩みを語るというからかなり若く見えるが、明後日40歳の少なくない年齢だ。ところが、この友達の質問と相談がいつも似ていて、霊性を持って答えられない。 元々ウェブデザイナーだが、一般視覚デザインに地境を広げたが限界を感じている状況であり、イラストレーターにも関心が高い。「今回OOアカデミーに受講申請しました。”やっぱり学歴が社会でネックになっているようなので、大学院に通おうと思います。「きちんと就職して活動するためにはポートフォリオが必須なので専門塾に登録しました。”今回神学大学校に通い始めました。 宣教に活用される絵を描きたいです。 そのためには······「似たようなパターンで10年以上こうしている。 最近、私の答えもパターンが似ている。「通って、通って。「やってみて」とか···「誠意がなさすぎるんじゃないかって?いや、私も最初からそうではない。 誠意をもって答え、方法もかなり親切に教えてくれた。 非常に止めたりもした。 しかし、行動は依然として残っている。 ある時は童話公募展に出品しようと準備中だと言ったが、いざ過ぎてみれば参加できなかったし、童話のイラストをしたいからといって習作でも見せてくれと言えばないとか見せるほどではないという。 何を見れば評価をし、次の段階を案内しようが止めようがするのではないか。 今何もせずに習えば、ある日突然一筆揮毫の名作が出てくると思うのか······とにかくそのようにずっと何かをするというが、神学大学校もどれだけ通うか分からない。 私が見るには行かなくてもいい所に行き過ぎだと思う。 手に負えないのか、今は課題と発表内容まで見てほしいという。 以前の職場で私が面接を受けて職員として採用したように、自分の分野で仕事をかなりする友達なのに自ら足りないと思っていて、ウェブ側の将来性を確信できないから、しきりに他の道を模索しながら自分のコンプレックスに勝つために何か重ね塗りしようとしているようだ。 主専攻分野で他のところに行くには障壁があるのは当然だが、少しでも学んだら使って食べて、だめでもぶつかってみて、死に物狂いで飛びかかってもいいかどうかなのに、自ら練磨せずに塾や学校、講師が実力をどれだけ引き上げてくれると思っているのか分からない。私は後輩の年齢と時間がもったいない。 もちろん、すべての人が死ぬほど努力し、何かを成し遂げるために人生を激情的に燃やす必要はない。 たいていは何かを成し遂げるために戦々恐々とする人々が拍手を受けるが、彼らが失う大切な価値もいくらでもあるからだ。 ただ、そのようなことに満足できなくて何かを成し遂げようとする人なら、自己実践と努力を怠ってはならない。私たちが勘違いしやすいことが一つある。 それは、誰でも熱心に磨き上げればますます実力が向上し、ある程度自己絶頂の能力を持つことができると考える点だ。 ここにだまされる人が多い。 人には誰でも「全盛期」がある。 最近の人々は「リーズ時代」とも呼ぶ。 これはどういう意味かと思ったら、英国プレミアリーグマンチェスターユナイテッド所属のサッカー選手アラン·スミスの技量が以前ほどではないが、たまに昔の実力が出れば「リーズ時代」、すなわちリーズユナイテッド時代並みのプレーを見せるという表現だそうだ。 つまり「リーズ(Leeds)」はイギリスの都市名だが、これがまるで古事成語のように象徴化され普遍的に使われているため全盛期を意味する言葉になったのだ。 「ベギと宿題の心情」と言えば、国を失った悲しみを語るのと似ている(中国·殷の王子だった彼らは、周の武王が殷を攻撃して王朝を建てると、周の穀物すら拒否し、首陽山に隠れてワラビを採って飢え死にする)。とにかくサッカー選手のスミスはリーズ時代より経験も多く、練習も加えたが、なかなか過去の技量を見せられない。 サッカー選手だから体が老化してそうかもしれないが、他の芸術文化分野も身体の力が多く必要なことではないのに、一定期間が過ぎれば全盛期の能力を発揮できない場合が多い。 海外の有名歌手たちを見ればそれこそ全盛期があってすごい名盤を発表したりもしたが、音楽をもっと学んで練習するのに以後はそれだけの作品を出せない事例が大部分だ。 それで大体伝説になった歌手たちは解体されたり夭折した人々である場合が多い。 全盛期に自殺したり事故死した人たちが生きていたら、その技量を維持し続けるか、より良くなったことを計算して途方もない天才を失ったと言われているが、実際には彼らは過大評価され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 たった3編の遺作を残したジェームズ·ディーンが生きて演技を続けたとすれば、これだけの名声があっただろうかという疑問も同じ脈絡だ。 それで全盛期のオーラを乗り越えられないような恐怖とストレスに人生を背負う芸能人もいるのだ。彼らが自分の全盛期を再現できない理由は、人の能力とは単に自分の力だけで具現されず、多様な変数が要因になってシナジー効果を起こすためだ。 一緒に仕事をする同僚やメンバー、人々の関心など色々な要因が自らの没入と会って途方もない結果を出すのだ。 しかし環境も変わり、お金と人気を味わった後に緩めば能力も動力も失うことになる。 必要性、当為性、切実さに自信と興奮が加わると怪力を発揮するのが人だ。 しかし、毎日そのような状態を維持することはできないため、全盛期は持続できない。 どんな職業でも全盛期を維持するためには、以前よりもっと努力するか、他の知恵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 第3牧師や説教者も同じだ。 一時、心霊骨髄を割るように鋭い説教をしていた牧師も、いつのまにか引退して季節はずれの芸話説教を聞かせてくださるのに…··· 旧情を思い「アーメン」で応えてみるが、加わった年輪の知恵を消えた若さの銃器が圧倒する感じというか…··· その上、聞く人は「市場がおかず」と、渇望が恩恵の必須要件だが、冷淡な胸と重い頭ではその昔の熱さを汲み上げることができない。 古い教会、古いクリスチャンの悲哀を和えた苦い場面だ。すべての原理がそうだ。 私たちが神様を初めて知って会えば、多くの情熱と興奮と驚異に毎瞬間あらゆる細胞が生きて呼吸し神様を感じるように常に喜び休まず祈り、凡事に感謝することになる。 しかし、その時期が過ぎれば信仰の年輪が加わり聖書知識が増え、神様をさらに深く知ることになったにもかかわらず、感動や初心はなかなか戻ってこない。 人生が真っ逆さまになって「帰ってきた蕩者」ぐらいになってこそそのような感激が生じるか言葉まで、恩恵のために罪を犯すこともできない。とにかく、私たちの信仰の全盛期回復は死ぬまで間違っていると思うほど永遠に捕まる蜃気楼のようで、自責と失望を繰り返すことになる。 同じように人生の全盛期を経験した人が未来にそれが再び来るとは考えられないが、まだ全盛期に会っていない人も必ずしもそのような日が来るとは断定できない。 上がってまた上がれないはずがないと考えるのは、多くの場合に錯覚だ。 人生はいつも私たちをだます。それで絶えず学んでいつか何かを見せようとする人がいれば、全盛期は日になれば毎日来るわけではないという事実を思い出させてあげたい。 もちろん、これ以上良くなることはないだろうか。 かつて考えられなかった深さや円熟さ、世の中を眺める知恵と安定した姿勢、広い視野は以前に持っていなかったものだ。 しかし、爪を得て歯を奪われた猛獣のように、無気力はどうにもならない。 しかも世の中の風潮は急速に変わり、トレンドも変わる。 熱心に大型免許を取ってバス運転手として就職しようとするが、すでにAI運転手がその場に座っていることもありうる。 つまらないが、歳月が私たちを待ってくれないという話は事実だ。今日もその後輩の母親は40歳になって嫁にも行かず、大学に塾にあらゆる分野が必ず必要だとし、職場も辞めて努力する娘をもどかしがると、私の助言が母親の小言と似ている。 しかし、神様も常に言葉だけ先に進んで足踏み状態の聖徒がもどかしいだろう。 それよりはむしろ静かに平安を享受した方がましだ。本人はもどかしいかと思って残念だが、今は能力と可能性より時間を振り返り、できることから着実にやっていく時だ。 後で手一杯に何かを見せようとせず、世の中の時間割と私の時間、そして条件をよく考慮して歳月も心も浪費してはならない。 もう一年の半分が終わった。 私は何をして、どのようにして、どのくらい育ったのか······ 私の全盛期、私の全盛期はまだ来ていないのではなく永遠に過ぎてしまったのではないか???4聖書は何と言おうか? 実際、聖書には自分を磨いて何かを成し遂げろと督促する言葉はないようだ。 いずれも大義のために、それも心を尽くして内実を期するという趣旨が大部分であり、時間を短縮しろという言葉はなさそうだ。 むしろ過度な知的探求を止めたりもする。息子よ、これらの言葉で勧告を受けなさい。 多くの本を作ることは終わりがなく、たくさん勉強することは肉体を疲れさせる。 (前12:12)また、最後の時は義人たちではなく、世の中があちこち走り回って速く行き来するとダニエル書に予言しただけだ(ただし12:4)。 だから時間に追われて無駄に忙しいのは、それほど聖書的とは言えない。 究極的に日を遅らせてはならないことは「救援」だけだ。しかし、「姿勢」に関する言葉は多い。 そのうち怠け者に対する各種警告は、すなわち時間を浪費して遅滞することも含まれると見ることができる。怠け者の手は苦労することを拒否するので、彼の欲望が彼を殺す。 (眠り21:25)怠け者は愚かさの別の言葉にも使われる。怠惰な者よ、アリのところに行ってアリの道を深く見て賢い者になれ。 (眠り6:6)ダーラントの比喩でも主人は「悪で怠惰な種」を明確に責めるように、一定の時間が過ぎたのに怠けていつも元の場所に留まるとそれもまた誤りだ。また、このような言葉もある。時間で保健大学の君たちが当然教える者になるべきだったが、神様の言葉の第一基礎原理を他人に再び教えなければならない必要が君たちにあるから、君たちが固い食べ物ではなく濡れる必要がある者になった。 (ひ5:12)時間で言えばもう師匠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いつも尋ねてばかりで牛乳を取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나에게는 잊을 것 같으면 연락해 질문을 쏟아내거나 진로 고민을 이야기하는 후배가 있다. 정확히는 부하였던 친구라 그리 가까운 후배는 아니지만 진로 고민을 이야기한다고 하니 꽤 젊어 보이지만 모레 40세의 적지 않은 나이다.그런데 이 친구의 질문과 상담이 늘 비슷해 영성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원래 웹디자이너지만 일반 시각디자인으로 지경을 넓혔지만 한계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라 일러스트레이터에도 관심이 많다.이번에 OO아카데미에 수강신청했어요.”역시 학력이 사회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서 대학원에 다니려고 합니다.제대로 취업하고 활동하려면 포트폴리오가 필수여서 전문학원에 등록했어요.”이번에 신학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선교에 활용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비슷한 패턴으로 10년 이상 이러고 있다. 요즘 내 대답도 패턴이 비슷해.다녀, 다녀.’해봐’라든가…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니냐고요?아니, 나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아. 성의껏 대답하고 방법도 꽤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아주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행동은 여전하다. 어떨 때는 동화 공모전에 출품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지만 막상 지나고 보니 참여하지 못했고 동화 일러스트를 하고 싶다고 습작이라도 보여달라고 하면 없다거나 보여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뭘 보면 평가를 하고 다음 단계를 안내하든 말든 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배우면 어느 날 갑자기 일필휘호의 명작이 나올 줄 아느냐…. 아무튼 그렇게 계속 뭘 한다는데 신학대학교도 얼마나 다닐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안가도 되는 곳으로 너무 많이 가는 것 같아. 감당이 안 되는지 이제는 과제와 발표 내용까지 봐달라고 한다. 예전 직장에서 제가 면접을 보고 직원으로 채용했던 것처럼 자기 분야에서 일을 꽤 하는 친구인데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웹 측의 장래성을 확신할 수 없으니까 자꾸 다른 길을 모색하면서 자기 콤플렉스를 이기기 위해 뭔가 덧칠하려는 것 같다. 주전공 분야에서 다른 데 가려면 장벽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조금만 배우면 쓰고 먹고 안 돼도 부딪혀 보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연마하지 않고 학원 학교 강사가 실력을 얼마나 끌어올릴 줄 아는지 모르겠다.나는 후배의 나이와 시간이 아깝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죽을 만큼 노력하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삶을 격정적으로 불태울 필요는 없다. 대개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전전긍하는 사람들이 박수를 받지만 그들이 잃는 소중한 가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이라면 자기 실천과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게 하나 있어. 그것은 누구나 열심히 연마하면 점점 실력이 향상되고 어느 정도 자기 절정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여기 속는 사람 많아. 사람에게는 누구나 전성기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리즈 시대라고도 부른다. 이게 무슨 뜻인가 했더니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 축구선수 앨런 스미스의 기량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가끔 옛날 실력이 나오면 리즈 시절, 즉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수준의 플레이를 보인다는 표현이란다. 즉 ‘리즈(Leeds)’는 영국의 도시 이름인데, 이것이 마치 고사성어처럼 상징화되고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전성기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다. 배기와 숙제 심정이라고 하면 나라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중국 은나라 왕자였던 이들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해 왕조를 세우자 주나라 곡물조차 거부하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다 굶어 죽는다). 어쨌든 축구선수 스미스는 리즈 시절보다 경험도 많고 훈련도 더했지만 좀처럼 과거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다. 축구선수라 몸이 늙어서 그럴지 모르지만 다른 예술문화 분야도 신체의 힘이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닌데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성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 유명 가수들을 보면 그야말로 전성기가 있어 대단한 명반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음악을 더 배우고 연습하는데 이후에는 그만한 작품을 내지 못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개 전설이 된 가수들은 해체되거나 요절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전성기에 자살했거나 사고사한 사람들이 살았다면 그 기량을 계속 유지하거나 더 나아진 것을 계산해 엄청난 천재를 잃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은 과대평가됐을지도 모른다. 단 3편의 유작을 남긴 제임스 딘이 살아 연기를 이어갔다면 이만큼 명성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전성기의 아우라를 넘지 못할 것 같은 공포와 스트레스에 인생을 짊어지는 연예인도 있는 것이다.이들이 자신의 전성기를 재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능력이란 단순히 자신의 힘만으로 구현되지 않고 다양한 변수가 요인이 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나 멤버, 사람들의 관심 등 여러 요인이 스스로의 몰입과 만나 엄청난 결과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도 변하고 돈과 인기를 맛본 뒤 느슨해지면 능력도 동력도 잃게 된다. 필요성, 당위성, 절실함에 자신감과 흥분이 더해지면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매일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전성기는 지속될 수 없다. 어떤 직업이든 전성기를 유지하려면 이전보다 더 노력하거나 다른 지혜를 내야 한다. 제3목사나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한때 심령 골수를 쪼개듯 날카로운 설교를 하던 목사님도 어느새 은퇴해 철 지난 예화설교를 들려주시는데 옛정을 생각하며 아멘으로 화답해보지만 더해진 연륜의 지혜를 사라진 젊음의 총기가 압도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듣는 사람은 시장 반찬과 갈망이 은혜의 필수 요건이지만 냉담한 가슴과 무거운 머리로는 그 옛날의 뜨거움을 퍼내지 못한다. 낡은 교회, 오래된 크리스천의 비애를 버무린 쓰라린 장면이다.모든 원리가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처음 알고 만나면 많은 열정과 흥분과 경이로움에 매 순간 온갖 세포가 살아 숨쉬고 하나님을 느끼도록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신앙의 연륜이 더해져 성경 지식이 늘어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음에도 감동이나 초심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이 곤두박질쳐 돌아온 탕자쯤은 돼야 그런 감격이 생길지 말까지, 은혜를 위해 죄를 지을 수도 없다.어쨌든 우리 신앙의 전성기 회복은 죽을 때까지 잘못됐다고 생각할 정도로 영원히 잡히는 신기루와 같아 자책과 실망을 거듭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전성기를 경험한 사람이 미래에 그것이 다시 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아직 전성기를 만나지 못한 사람도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올라가서 다시 못 올라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착각이다. 인생은 언제나 우리를 속인다.그래서 끊임없이 배워 언젠가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사람이 있다면 전성기는 날이 되면 매일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물론 더 나아질 수는 없을까. 일찍이 생각하지 못했던 깊이와 원숙함,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와 안정된 자세, 넓은 시야는 전에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손톱을 얻고 이빨을 빼앗긴 맹수처럼 무기력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세상 풍조는 급속히 변하고 트렌드도 바뀐다. 열심히 대형 면허를 따고 버스기사로 취업하려 하지만 이미 AI 운전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 재미없지만 세월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오늘도 그 후배 엄마는 마흔 살이 돼서 시집도 안 가고 대학에 학원에 온갖 분야가 꼭 필요하다며 직장도 그만두고 노력하는 딸을 답답해하면 내 조언이 엄마 잔소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도 늘 말씀만 앞서서 답보 상태인 성도들이 답답할 것이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평안을 누리는 편이 낫다.본인은 답답할까봐 아쉽지만 지금은 능력과 가능성보다 시간을 되돌아보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갈 때다. 나중에 힘껏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지 말고 세상 시간표와 나의 시간, 그리고 조건을 잘 고려해 세월도 마음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끝났다.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서, 얼마나 자랐는지…… 나의 전성기, 나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나버린 것은 아닐까???4 성경은 뭐라고 할까? 사실 성경에는 자신을 닦고 무언가를 이루라고 독촉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모두 대의를 위해, 그것도 마음을 다해 내실을 기하자는 취지가 대부분이어서 시간을 단축하라는 말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과도한 지적 탐구를 멈추기도 한다.아들아, 이 말들로 권고를 받아라. 많은 책을 만드는 것은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육체를 피곤하게 만든다. (전 12:12) 또한 마지막 때는 의인들이 아니라 세상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빠르게 오갈 것이라고 다니엘 서에게 예언했을 뿐이다(다만 12:4). 그러므로 시간에 쫓겨 쓸데없이 바쁜 것은 그리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날을 늦춰서는 안 되는 것은 구원뿐이다.그러나 자세에 관한 말은 많다. 그 중 게으른 사람에 대한 각종 경고는 곧 시간을 낭비하고 지체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게으른 손은 고생하기를 거부하므로 그의 욕망이 그를 죽인다. (잠 21:25) 게으른 사람은 어리석음의 다른 말로도 쓰인다.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개미의 길을 깊이 보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라. (잠 6:6) 달란트 비유에서도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을 분명히 책망하듯이 일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게을러 늘 제자리에 머무르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또 이런 말도 있다.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했는데 하나님 말씀의 첫째 기초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다시 가르쳐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으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가 있는 자가 됐다. (일5:12) 시간으로 치면 이제 스승이 되어야 하는데 항상 묻기만 하고 우유를 섭취할 수가 없었다.